어느 순간 규칙이 참을 수 없이 불편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유능한 사람들 사이에서 규칙과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이 불편하다. 규칙은 대부분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설계된다. 누군가 실수할 수 있으니 승인을 받게 하고, 누군가 오판할 수 있으니 매뉴얼을 만든다. 그 의도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규칙이 실수하지 않을 사람, 오판하지 않을 사람에게까지 동일하게 적용될 때 생기는 마찰이 나를 오랫동안 괴롭혀 왔다.
이 지점은 내가 조직에서 동료들, 리더들과 끊임없이 부딪히며 밸런스를 찾아야 했던 지점이었다. 나는 늘 조직 내에서 규칙을 추가하고 개인의 한계를 규정하는 일에 비판적인 시각으로 반대하며, 더 넓은 자율의 영역을 대변해 왔다. 단순한 고집이 아니었다. '나는 어떤 환경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내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조직을 만들어야 비로소 가슴 뛰는 결과를 낼 수 있는가'를 두고 나름 치열한 고민 끝에 내린 답이었다.
포드의 역설
영화 《포드 V 페라리》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등장인물 중 누구도 악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 윤리적으로 틀렸는가를 묻는 대신, 거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누가 옳은 방식으로 이길 것인가'라는 난제를 두고 벌어지는 인물들 간의 대립과 긴장감이 돋보인다. 포드의 레이싱 총괄 임원 레오 비브는 단순한 악역이나 방해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동차 경주장에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기술적 전문성이 아니라 '조직적 역량'을 위해 발탁된, 철저한 관리자. 헨리 포드 2세가 건넨 'You better win'이라는 네 단어짜리 명함을 평생 지갑에 넣고 다녔다는 일화가 그의 본질을 말해준다. 거대한 조직을 운영하고 브랜드의 이익을 보호해야 하는 관리자로서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합리성이 결승선에서 켄 마일스의 진정한 승리를 빼앗았다.
이 서사에서 내가 주목한 건 거대한 아이러니다. 포드가 페라리를 이기기 위해 결국 해야 했던 일은, 자기 시스템을 버리는 것이었다. 대량 생산의 논리로는 레이스카의 공기역학을 풀 수 없었다. 매뉴얼과 회의실 데이터에 의존한 초기 GT40은 트랙에서 이륙해버리거나 기어박스가 박살 나며 참패를 거듭했다. 켄 마일스가 차체에 털실을 붙이고 주행하며 바람의 흐름을 맨눈으로 관찰하는, 컴퓨터가 아닌 자기 몸의 감각으로 차의 한계를 측정하는 원초적이고 비효율적인 방식을 동원했을 때 비로소 문제가 풀렸다.
골리앗이 다윗을 이기기 위해 다윗의 방식을 빌려야 했다는 것. 거대 자본이 아닌 한 인간의 직관과 집요함이 시스템을 구원했다는 것. 그런데 포드는 마지막 순간에 사진 한 장을 위해 그 자율성을 다시 억압했다. 이 모순과 비극은 조직에서, 어쩌면 나와 가까운 곳에서 매일 반복되고 있다.
규칙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리더가 규칙을 통해 조직을 통제하려는 시도 자체에는 악의가 담겨있지 않다. 시스템의 예측 가능함과 리스크를 최소화라는 어떻게 보면 중요한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경영의 전통적인 본능이다. 과거 제조업 기반의 성장을 견인해 온 그 노고를 폄하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질문을 주기적으로 던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규칙이 지금 누구를 보호하고 있는가?'
《포드 V 페라리》에서도 이 모순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셸비가 차의 기계적 결함을 발견하고 수정을 요청하면, 보고서는 수많은 중간 관리자의 서류철을 거쳐야 했다. 서류가 책상에서 책상으로 이동하는 동안 르망을 준비할 피 같은 시간은 허무하게 소진되었다. 경영진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조직의 효율성을 갉아먹는 불필요한 비공식적인 절차들. MIT에서는 이런 현상을 '숨겨진 공장'이라 부른다. 셸비가 결국 헨리 포드 2세를 직접 조수석에 태워 폭력적인 수준의 레이싱을 체험시킨 뒤, 관료적 결재 체계를 우회하는 직통 라인을 뚫어낸 것에서 나는 많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공감했다. 규칙이 보호하겠다던 바로 그 효율을, 규칙 자체가 잡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규칙과 감시가 신뢰를 대체할 때, 구성원들은 본질적 목표가 아닌 통제를 회피하는 데 에너지를 쏟게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뛰어난 인재들의 심리적 이탈이 아닐까. 압도적인 역량을 발휘하고 싶은 사람에게 최고의 복지는 탁월한 동료들과 함께 일하는 것 그 자체다. 그런데 조직이 평범함을 용인하고, 자율 대신 통제를 선택한다는 시그널을 보내면, 진정으로 조직을 이끌어갈 사람들의 마음이 먼저 떠나게 된다. 규칙으로 리스크를 통제하려던 시도가 조직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들을 내쫓는 가장 치명적인 리스크를 낳는 것이다.
맥락이 통제를 대체할 때
넷플릭스의 No Rules Rules 철학이 내게 깊이 와닿는 이유는, 그것이 자유방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리드 헤이스팅스가 설계한 것은 규칙의 부재가 아니라 규칙의 대체물이다. 넷플릭스의 비용 정책은 '넷플릭스에 가장 이익이 되게 행동하라'는 한 문장이다. 휴가 정책은 '휴가를 가라'는 두 단어 뿐이다. 이것이 작동하는 이유는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지출이 왜 회사에 이익이 되는지 내 상사에게 당당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설명하기 꺼려지면 멈추거나 의논한다. 규칙이 사라진 자리에 오너십이 들어앉는 구조다.
넷플릭스가 '통제가 아닌 맥락으로 리드하라'고 말할 때, 리더의 역할은 지시가 아닌 컨텍스트의 투명한 제공으로 바뀐다. 산업 동향, 전략적 목표, 가용 자원. 이 모든 맥락을 현장에 쏟아부은 다음, 판단은 전적으로 실무자에게 맡긴다. 상사를 기쁘게 하려 하지 말고, 회사에 최선이 되는 일을 하라. 심지어 상사가 반대하는 프로젝트라도 본인이 확신한다면 베팅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지향하는 방식이다. 지시하고 승인하는 리더가 아니라, 맥락을 깔아주고 물러나는 리더. 현장의 감각을 가진 사람이 현장의 결정을 내리는 조직.
자율의 전제 조건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전제 조건이 충족될 때만 성립한다. 넷플릭스가 규칙을 없앨 수 있었던 건 규칙이 필요 없을 만큼 뛰어난 사람들로만 조직을 채웠기 때문이다. 인재 밀도. 이 한 가지가 모든 것의 기반이다. 물론 자율은 무조건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 충분한 맥락 없이, 준비 없이 부여된 자율은 방임이 된다.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함께 일하는 동료를 신뢰하는 쪽에서 출발한다. 신뢰가 먼저고 그 신뢰가 틀렸다고 증명되기 전까지는 자율이 기본값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넷플릭스의 Keeper Test는 냉정하다. '이 사람이 내일 이직하겠다고 하면,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붙잡을 것인가?' 붙잡을 마음이 들지 않으면 두둑한 퇴직금과 함께 보낸다. 냉혹해 보이지만, 이 과정을 거친 뒤 남은 사람들은 주변에 자신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동료만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 확신이 자율의 토대가 된다. 그리고 상사의 승인이 사라진 자리에서 궤도를 잡아주는 건 동료들의 완전한 솔직함 위 가차 없는 피드백이다. 신입이라도 CEO에게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하고, 상급자는 하급자의 비판을 업무의 완결성을 높이기 위한 조언으로 수용해야 한다.
교향악단이 아닌 재즈 밴드
나는 가슴 뛰는 목표와 비전을 향해 달려가는 조직을 추구한다. 리더의 역할이 통제와 감시가 아니라, 훌륭한 연주자들을 무대에 올리고 기본 테마만 던져주는 '재즈 밴드'와 같은 조직.
전통적 리더십이 추구하는 교향악단에서는 지휘자가 악보를 나눠주고, 모든 연주자가 한 치의 오차 없이 따르는 것을 아름답다 여긴다. 즉흥은 허용되지 않는다. 실수는 전체 화음을 깨뜨리는 불상사다. 기계 공업 기반의 대량 생산 체제라면 교향악단이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르다. 언제 어떤 멜로디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 어느 때보다 큰 불확실성 위에 있다. 악보대로 연주하는 사이 경쟁자들은 무대를 뒤집어 놓는다.
재즈 밴드의 리더는 지휘봉을 쥐지 않는다. 실력 있는 뮤지션들을 선발해서 무대에 올리고, 기본적인 테마만 던져주는 것으로 역할을 다한다. 탁월한 인재들은 악보 없이도 서로의 호흡과 감각을 교환하며 기존에 없던 선율을 실시간으로 창조해낸다. 다소 느슨하고 헐거워 보이는 그 연주 속에서, 가장 극적인 파괴적 혁신이 피어난다.
상상의 한계를 규정짓지 않는 도구
이 자율에 대한 철학은 사람과 조직에만 머물지 않는다. 나는 사내 메이커들을 위한 도구를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다. 디자인 시스템이든 에디터든, 도구는 일관성이라는 가치를 위해 쉽게 규칙이 된다. 그리고 규칙이 된 도구는 메이커의 상상을 그 범위 안에 가둔다.
내가 꿈꾸는 도구는 무언가를 강제하는 도구가 아니라, 맥락을 제공하는 도구다. 넷플릭스가 비용 정책을 한 문장으로 대체했듯, 좋은 도구는 사용자에게 "당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메이커의 상상의 한계를 규정짓지 않는 것. 언제나 그것이 내가 바라는 이상향이었고, 그것을 향해 노력해 왔다.
결론
나는 자율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진 동시에, 그 신념이 현실에서 충돌하는 경험을 반복하는 중이다. 그 충돌을 겪으며 깨달은 것은, 자율을 주장하는 일 자체가 아니라 자율이 작동할 수 있는 기반을 먼저 만드는 일이 나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인재 밀도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 것. 맥락을 투명하게 공유하는 것. 솔직한 피드백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 세 가지가 선행되지 않으면 자율에 대한 주장은 그저 방임일 뿐.
규칙과 통제는 무지하고 무책임한 자들이 끔찍한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막아줄 수는 있어도, 뛰어난 역량을 가진 자들이 한계를 돌파하도록 밀어 올려주지는 못한다. 모든 위대한 혁신은 규칙이 빼곡하게 적힌 두꺼운 매뉴얼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가장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지독한 몰입, 트랙의 냄새를 맡고 타이어의 온도를 느끼려 했던 한 인간의 감각 속에서 시작되었다.
결국 경쟁에서 마지막 결승선을 끊는 자는 규율을 가장 잘 따른 자가 아니라, 두려움 없이 한계에 도전할 자유를 허락받은 자일 것이다.